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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중력

톰늍 최애가 잃은 것이 돌아온 할로윈



BGM : Broods - Sleep Baby Sleep




1


유난히 바다가 조용하고 파도는 극적으로 높다. 토마스는 자주 이 절벽에서 뉴트의 비를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곤 한다. 세상의 정가운데에 뚫린 공백은 때를 가리지 않고 자주 토마스를 거스를 수 없는 중력으로 끌어들인다. 그럴 때마다 토마스는 바다가 보이는 뉴트의 묘를 찾는다. 여기에 뉴트가 있다, 고 생각해야 토마스는 다시 세상을 마주볼 수 있다. 퍼프 더 매직 드래곤 리브 바이 더 씨…… 들어 본 적도 없는 곡조가 무의식처럼 흘러나오는 일도 잦다. 우리가 아는 노래가 있기는 해? 자조적으로 묻는 말에 토마스는 어깨를 으쓱한다. 글쎄…… 호르헤의 18번? 장난스러운 대꾸에 귀에 익은 웃음소리가 추억처럼 들려온다. ……뉴트. 토마스가 입을 뗀다. 바람이 멈춘다. 이제 나 좀 내버려 둬. 파도처럼 부서지는 뉴트의 웃음이 잦아든다. 토마스는 바다만 응시한다. 무슨 소리야. 뉴트는 퍽 날카롭게 말을 뱉고, 못 놓는 건 너잖아. 지금도 날 쳐다도 못 보잖아. 바라보면 사라질까 봐.

……뉴트는 언제나 지나치게 똑똑했다. 말문이 막힌 토마스는 대꾸하지 못한다. 바다에서 시선을 거두고 제 발끝을 바라본다.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뉴트가 토마스를 부른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으로. 나즈막히. 다시는 못 들을 목소리였다.



2


해도 안 들었는데 저절로 눈이 뜨인다.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꾼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막사 새로 스미는 이날의 첫 햇살은 바닷가의 안개 탓에 영 흐릿하다. 스산한 바람에 앓는 소리를 하며 몸을 뒤척인다. 토마스의 공간은 휑하다. 잠이 다시 오질 않고 꿈조차 기억나지 않아 토마스는 이내 김이 샜다는 듯 이불을 제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비척대며 걸어가 천막을 젖혔다. 벌써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한 몇몇 아이들이 대충 눈곱을 데는 토마스를 보고 아는 척을 한다. 이곳의 아이들은 잠을 깊게 자지 못했다. 토마스도 마주 대강 손을 흔들어 주고 나니 가물거리던 오늘의 꿈은 더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허상까지 기억하기에 토마스가 기억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많다.

씻기 위해서는 공용으로 연결해 놓은 수도에서 물을 받아야 한다. 바다와 바로 마주하고 있음에도 이 수도를 연결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는지 모른다. 두 달쯤 지나 기온이 손 쓸 수 없이 떨어지면 수도가 얼어 얼마나 고생할지 현재의 토마스가 알 리가 없다. 벌써 바람은 살을 에는 듯 했지만 수온을 조절할 방법은 없었다. 토마스는 되는대로 찬 물에 세수를 한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난다. 키가 일 미터 남짓이던 그를 한 팔로 들고 이상기후로 벌겋게 탄 얼굴을 열심히 닦아주던 하얀 손바닥. 찬 물이 지나가서 더욱 뜨겁게 느껴지던 그 열기…… 어?

토마스는 얼굴을 문지르던 손을 멈춘다. 옛날 생각이라니. 옛날이라니. 우리에게 삼 년 전보다 더 오랜 옛날이 있을 리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생각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토마스는 다시 물줄기에 손을 받친다. 물방울이 턱을 타고 내려와 옷을 적시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인다. 감각이 익숙해져서인지 양뺨을 적시는 물 온도가 조금 따뜩해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속눈썹을 적시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온기의 수원이 감은 두 눈인 줄 아직 알아채지 못하고.


그날, 토마스가 세수를 하다 말고 갑자기 밀려와 어딘가 뻥 뚫린 곳을 채우는 기억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수도꼭지를 붙잡고 엉엉 통곡한 그날.


두번째는 해리엇이었다. 해리엇은 브렌다와 함께 숲에 정찰을 나가기 위해 짐을 챙기던 중 손에 힘이 풀려 자기도 모르게 떨어뜨린 가방 위로 무너졌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주방, 그날 바다로 가져갈 작살을 손질하던 도중, 땔감으로 쓰기 위한 낙엽을 긁어모으러 들어간 숲. 아이들의 기억은 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갑자기 찾아왔고 그 험한 미로를 탈출한 아이들은 기억 앞에서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꿈에도 예상치 못한 현상에 매일같이 성실하게 돌아가던 세이프 헤이븐의 시간이 우뚝 멈추었다.

세이프 헤이븐에 도착한 이래로 부쩍 잠이 많아진 민호는 토마스가 급히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겨우 눈을 뜬다. 이전보다 가벼워진 책임에 예민하던 기질이 많이 죽은 탓이다. 그러니까 기억이 돌아왔다고? 무슨 기억? 그러니까 옛날이 어떤 옛날? 생각해 봐. 너는 뭐 기억나는 거 없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으며 토마스를 바라보던 민호의 눈빛이 토마스의 재촉에 일순간 달라진다. 민호? 토마스가 그애의 어깨를 붙잡자 민호는 애써 시선을 추스르고 토마스와 눈을 맞춘다. 그렇구나. 천천히 내려가는 고개.


잊었던 게 없는 아이들과 기억에 무너지기엔 더한 것도 겪어온 어른들은 그날의 할일을 떠나며 기억을 되찾은 아이들을 막사에 몰아 넣었다. 괜히 얼 빠진 채로 돌아다니다가 절벽에서 굴러떨어져 뒈지지 말라는 사려 깊은 판단이었다. 막사의 아이들은 모두 글레이드에서 온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모여 앉아 있는 것에서부터 묘한 향수를 느끼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언제고 어디서고 진지한 상황에서조차 눈만 마주치면 웃음이 터져나오던 아이들은 선뜻 어떤 말을 꺼내지 못한다. 숨 막히는 분위기에 눈치를 살피는 아이도 더럿 있다. 오늘이 며칠이지? 결국 적막을 깨고 누군가 물은 말이 화두가 된다. 개중에는 일력이 없이 살던 아이들이 태반이었지만 용케 대답이 나온다. 10월 31일. 갑자기 생각나서 그런데 너희들…… 할로윈 데이라고 알아?

알지. 트릭 오어 트릿. 플레어 전에는 밤이면 이상한 분장을 하고 집집마다 사탕 얻으러 다녔다고 하잖아.

우리야 책에서 읽은 게 다긴 하지만. 호박으로 랜턴도 만들었다며. 우리 어릴 땐 먹을 호박도 마땅치 않았는데.

할로윈 유래가 켈트 족 전통 축제거든. 죽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라고 믿었대. 젠장. 별 게 다 기억나네.

맨 먼저 할로윈 운운한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그거야. 오늘이 할로윈이잖아.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일어난 이 이상한 증세가 할로윈 때문이라고?

빈정거림이 묻어나는 민호의 어투에 아이는 뭔가 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입을 다문다. 죽은 자가 돌아오는 날. 글레이드가 아닌 위키드의 연구소에서 온 아이는 모를 수도 있지만, 이곳 대부분의 아이들의 마음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리는 말이다. 민호 역시 그로 인해 날 선 반응을 보였으리라. 토마스는 발치를 내려다 본다. 막사에는 다시 정적이 흐른다. 민호는 자신의 실수를 자각하고 입을 다문 채 있는다. 그때 막사의 문이 걷히고,

민호.

부른 것은 세이프 헤이븐의 남서쪽 해안의 보초를 서는 아이다. 그애는 퍽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전한다. 보초를 서는데, 어떤 애가 나타났어. 인기척도 못 느꼈는데 잠시 다른 데를 보다 돌아보자 바로 세이프 헤이븐의 경계에 있었어. 우리 또래에, 민호 너와 글레이더들을 안대. 이름이……

벤이라던데.



3


죽은 아이들은 하나 하나 세이프 헤이븐을 찾았다. 벤, 알비, 브렌다의 동생 조지, 척, 윈스턴, B 미로의 레이첼, 또 다른 아이의 소중한 친구…… 찾아오는 이들이 다양한 만큼 그들을 맞이하는 아이들의 반응도 다양했다. 각각의 상처가 다르듯이.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민호를 벤이 먼저 부둥켜 안았다. 브렌다는 그들의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글레이드의 모든 아이들이 척의 주변으로 엉겨 붙어 서로를 꽉 안았고, 척은 먼 발치서 고개만 숙이고 있는 갤리에게 예의 그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이들의 마음의 구멍이 많았던 만큼 할로윈의 세이프 헤이븐은 미어 터질 만큼 사람이 넘쳐났다. 언제 분위기가 가라앉았냐는 듯 못다한 이야기 소리에 시끌벅적하다. 불청객 같던 기억들은 추억이 된다.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와, 너희도 그랬어? 우리랑 같았네.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지만 토마스는 그에 자연스럽게 섞이지 못한다. 그러기에는 여전히 토마스의 마음 속에서 자꾸만 그애를 방해하는 빈자리가 존재한다. 위키드에서의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나누는 A 미로의 글레이더 무리에서 토마스는 아무도 모르게 슬그머니 빠져나와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토마스는 갤리주 대신 물 따른 컵을 입에 가져다 대며 글레이드에서의 첫날을 떠올린다. 그때도 이렇게 무리에서 좀 떨어져 앉은 토마스를 먼저 찾아온 척과 뉴트를 떠올린다. 다들 그 이전의 추억에 빠져 있지만 토마스는 그 생각을 그만둘 수 없다. 어쩌면 자신은 그날 새로 태어난 것 같다는 생각도.

토마스.

갑자기 귀를 타고 들어온 목소리에 토마스는 화들짝 놀라 물컵을 엎는다. 허둥거리며 컵을 도로 집어들고 젖은 바지를 매만진다. 푹 젖지는 않은 바지에 안도하며 목소리의 방향을 올려다 본다. 척은 멋쩍은 표정을 한다.

미안.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지.

그냥, 아무도 말 안 걸 줄 알았는데.

혼자 너무 분위기 잡고 있길래.

토마스는 흐리게 미소한다. 척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통통한 두 뺨은 여전히 생기 넘치는 장미빛이고 여전히 토마스의 기분을 한층 낫게 해준다. 토마스는 척의 시선을 피해 자신의 젖은 바지를 만지작대며 살핀다.

토마스, 뉴트 생각 하지.

토마스는 손을 멈춘다.

뉴트가 안 보이길래 어디 일하러 갔나 했는데, 뉴트도…… 죽은 거지, 그렇지.

토마스는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런데 뉴트는 왜 안 올까. 너무 멀리서 와서 늦나.

토마스는 애써 고개를 들어 미소한다. 미안해. 뭐가. 지켜주지 못해서. 너도, 뉴트도…… 토마스는 척의 밤색 곱슬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는다. 모든 움직임에 애정이 어렸다. 척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한동안 토마스를 바라본다. 그리고 건네는 말.

토마스, 진짜 많이 컸네. 이제 어른 다 됐다.

……토마스는 하나도 어른이 되지 못한 그 아이 앞에서, 끝내 아이처럼 눈물을 참지 못하고.



4


차가운 물이 턱 끝에서 뚝뚝 떨어진다. 예상치 못하게 엉엉 통곡하는 토마스에 당황해서 정말로 그애가 어린애라도 되는 것처럼 같이 가 주겠다며 의젓한 척 하는 척을 만류하고 혼자서 수돗가에 내려갔다 오는 참이었다. 저녁 공기가 점점 싸늘해진다. 고개를 조금 젖혀 하늘을 올려다 본다. 벌써 노을이 지고 반대쪽은 짙은 남색으로 어둑어둑하다.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난 하루였지만 어느 때보다 짧게만 느껴졌다. 무엇보다, 뉴트가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시간동안 역시 나타나지 않을 거란 걸 실감한다.

-너무 멀리서 와서 늦나.

척의 말이 귓전에 아른거린다. 가장 늦게 갔으면서 멀리 가봤자 얼마나 멀리 갔다고. 다시 돌아오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가장 소중하던 사람에 대한 멍청한 원망을 목 끝까지 꾹꾹 눌러 담으며 걷는다.

사실 이유를 알 것도 같다고, 물기가 가시지 않은 뺨을 문지르며 생각한다.

서로의 이야기에 파묻혀 해가 지는 줄도 모르던 아이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나무에서 나무로 이어진 줄에 걸린 등불에 하나둘 불을 켠다. 일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올 시간이 되어간다. 다가오는 이별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에게 옛 친구들을 소개한다. 토마스의 막사는 그들이 있는 곳에서 조금 걸어야 나오지만 떠드는 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시끄럽다. 조금 걸어가자 불은 언제 피웠는지 캠프파이어 주변을 둘러싸고 앉아 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멀리서 그 애의 조금 충혈된 눈을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건지 프라이팬이 먼저 손을 크게 흔든다. 벤, 알비, 척도 토마스 쪽으로 고갤 돌리고 아는 척을 한다. 토마스는 흐리게 미소한다. 다시 그들에게로 향한다. 이별이 가까워진다.



0


토미. 너는 너에게로 겨누던 칼에 다친 나를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너의 표정 이후의 첫 기억이야. 잘 지내는지 궁금했어. 금속에 끌리는 자석처럼 생각만으로 네가 있는 곳으로 올 수 있었지. 보초 서는 아이가 졸고 있더라. 꼭 글레이드에서의 우리만큼이나 어린 애던데. 경비가 그렇게 허술해서 어떡해. 부대장이 없으니 공동체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지. 내가 죽은 지는 얼마나 됐어? 그런데 아직도 신참처럼 내 빈자리 하나 메꾸지 못해? 똘추야, 언제까지 걱정시킬 거야?

잔소리를 하러 온 게 아니라 네가 날 보고 싶어할까 봐 온 게 맞아. 너희가 보고 싶어서. 그런데 왜 자고 있을 때 왔냐고, 왜 깰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느냐고 네가 따질 일은 없어서 다행이야. 토미, 네가 날 보면 다시 한 번 나를 잃어야 하잖아. 내가 아니라 네가 죽은 것처럼 364일을 오늘을 기다리면서 지내겠지.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해. 네가 강해졌으면, 지금도 그렇지만 더 강해졌으면 해. 내 빈자리에 파도 앞 모래성처럼 무너지지 않기를. 그래서 네가 날 보지 않기를 바라. 네가 잠결에 중얼거리는 내 이름을 들어버려서.

참, 너도 기억이 났을지 모르겠네. 죽어서 이런 기억들이 밀려오는 건 아니라고 믿어. 다 내가 돌아온 이상한 힘에 의해서겠지. 잊었던 이름이 기억나. 내 이름을 잊더라도 절대 잊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어린 동생의 이름도. 기억해? 리지, 그러니까 소냐 말이야, 그 애도 보고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애도 나를 기억하겠지, 내 이름을 기억하겠지.

토미, 토마스, 네 이름이 궁금해. 내가 한 번도 네 이름을 들은 적이 없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야. 네가 내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이 슬프다. 우리는 영원히 서로의 이름을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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